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호는 춘원이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으며, 1937년 수양동우화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연설을 했고, 해방과 동시에 친일파로 지목되어 1949년에는 반민법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1917년에 발표된 무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로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민중 계몽을 담고 있다.
이광수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 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필 활동을 통해 이광수는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로 등장하여,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했으며, 그러한 주장은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었다. 그는 초기의 작품과 칼럼, 강연을 통해 허위와 이름뿐인 유교의 허례허식과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조롱하였다. 또한, 주요 저작들을 통해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였다. 그는 작품과 강연을 통해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는 점과, 여자도 사람이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여자의 해방은 가정의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여자의 해방은 자유 연애로서 이룩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유교 사상가와 조선 선비들은 풍속을 해치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며 비난을 가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7백년간 조선 사회에서 허례허식과 위선, 이름 뿐인 도덕과 겉치레만 남겼고, 나만이 옳다는 관점은 당쟁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과 선비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그가 유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문제삼아 상놈, 호로자식이라는 등의 극언을 퍼붓는다. 그러나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방에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평등하며, 사람이 귀중한 것이라는 견해를 설파하고 다녔다.